[허인욱의 무인이야기] 검선(劍仙)부자-김체건과 김광택 2

  

사행을 따라 일본에 가다


'무예도보통지' 왜검조를 보면,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검보를 얻어서 그 왜검술을 배워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의 「무예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조에도 군문인(軍門人) 김체건이 일본에서 8종의 검법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9월 29일자 기록을 보면, “왜검의 법은 일찍이 통신사행 때 별도로 장교(將校)를 보내어 다른 나라(일본)에서 배운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김체건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가서 검법을 배워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

숙종 당시 사행은 숙종 8년(1682)과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이 두 시기에 김체건이 일본 사행에 동행을 하지 않았을 것임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10년(1738) 10월 8일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이 영조에게 ‘왜검은 선조(先朝) 무오(戊午)년에 김치근(金致謹)이라고 불리우는 자를 보내어 왜국에서 배워오게 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10년 이전의 무오년은 숙종 4년(1678)이다. 이 해에 김치근이라는 이가 왜검을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것이다. 숙종대에 왜검을 배우기 위해 갔던 이는 '무예도보통지' 등의 기록을 통해 김체건이 확실하기 때문에 김치근이라는 인명은 김체건의 이름을 명확히 알지 못한 장붕익의 오해, 또는 당시 임금과 장붕익의 말을 옮긴 사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숙종 4년에는 통신사행이 없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숙종 8년의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이고, 이 때 김체건이 사행에 동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8년의 사행은 5월부터 11월까지였는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장군직을 물려받자 축하사절로 파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연행을 담고 있는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1718)의 '동사일록(東槎日錄)'에는 통신사 일행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지만, 김체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체건의 직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맡은 임무를 드러낼 수 없었고 또 본명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당시 사행에는 무인으로는 선전관(宣傳官) 양익명(梁益命)과 마상재인 오순백(吳順伯)․형시정(邢時廷) 등이 동행하였다. 오순백은 앞서 언급한 숙종 8년 통신사행의 기록을 담은 '동사일록'과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을 보아도 5월 15일 통신사행이 경북 예천에 머물렀을 때, 사또가 그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했다. 그의 검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보는 자마다 그의 기이한 재주를 칭찬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오순백이 마상재 뿐 아니라, 검무에도 매우 빼어났음을 말하는데, 오순백과 관련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가능성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혹 오순백이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통신사 행렬 부분


김체건이 사행을 따라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가면서 검보를 얻어 기법을 익혔는지 아니면, 혼자 사행에서 떨어져 나와 일본 각지를 돌며 왜검을 익혔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가 왜관에서 머슴살이를 몇 년 동안 해서 일본어에도 능숙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후자의 추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배운 기법에 대해서는 '무예도보통지'에는 토유류(土由流)․운광류(運光流)․천유류(千柳流)․유피류(柳彼流)의 4류가 있다. 이들 유에 관해서 토유(土由)를 토전(土田)으로 보면서 발음이 같은 호전(戶田)류로, 운광은 운홍류(雲弘流)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능허관만고'에는 왜검이 토유류부터 유피류까지 8류 였다고 하고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이 4류도 중간에 실전되어 운광류 만이 행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즉,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시기에는 김체건이 전한 많은 기법이 유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추론은 무예도보통지에 기재된 왜검법의 세 명칭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토유류: 기(起)-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
운광류: 기(起)-천리(千利)-속행(速行)-산시우(山時雨)-수구심(水鳩心)-유사(柳絲)-종(終)
천유류: 기(起)-초도수(初度手)-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종(終)
유피류: 기(起)-종(終)

운광류에는 천리․속행․산시우․수구심․유사 등 중국에서 유래된 검법과는 다른 일본에서 유래된 세로 보이는 세명이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3류 중에는 유피류에 초도수라는 세명 만이 전하고 있어, 세명 혹은 기법이 유실되었음을 말해준다.

숙종 8년의 일본 사행은 이해 11월 16일에 임금에게 돌아와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김체건도 이 시기 즈음에 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정식 사행과는 별개의 임무를 띠고 갔으므로 사행단과 별도로 일찌감치 귀국했을 수도 있다.

숙종 8년 11월에는 김석주(金錫冑)가 청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었는데, 이보다 한달 앞서 그를 동래에 내려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웠고 금위영(禁衛營)으로 소속을 옮긴 자를 데려가 저쪽(청)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여 숙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김석주가 언급한 인물이 김체건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김체건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위영으로 소속이 옮겨졌고 숙종 8년 11월의 사은사를 따라 청에 가서 그 곳의 무예를 습득해 왔을 가능성도 살필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 「병기총서(兵技總叙)」조를 보면, 숙종 16년(1690) 11월에 내원(內院)에서 훈련도감에 속한 왜검수의 기법을 시험하였다고 하는데, 김체건으로부터 왜검을 익힌 훈련도감의 왜검수들을 시험한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후 김체건의 행적은 숙종 23년(1697)에 나타난다. 별무사(別武士)로 재직하던 그는 정월에 운부(雲浮)․장길산(張吉山)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이영창(李榮昌) 및 그의 아우 이영만(李榮萬)과 종 중길(仲吉) 그리고 처 선옥(仙玉) 등을 뒤쫓아서 체포하기도 했다. 숙종 25년(1699) 6월에는 종4품 무관직인 두모포(豆毛浦)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숙종 37년(1711) 10월에는 별무사에 재직했다.

김체건에게는 1710년 이전에 태어난 아들 김광택이 있는데, 「김광택전」에 따르면, 광택이 7․8세였을 때까지는 김체건이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체건은 1717년, 1718년 이후에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김광택전」에는 “김광택은 서울 사람이고 아버지는 체건으로,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라는 서술이 있어, 김체건에게 김광택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그도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아 뛰어난 검객이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김광택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좀 더 알 수 있다. 영조 33년(1757)에 영조가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불러 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전문이다.

(영조 33년 11월 21일) 영조가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직)에게 명하여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궁에) 들어오도록 불렀다. 임금이 어영대장으로 하여금 물어 말하기를, “너는 김체건의 아들로 아명이 노미(老味)인가?”라고 하였다. 광택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너는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말하자, 광택은 “전 어영대장 홍봉한(洪鳳漢)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문관도, 무관도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군교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광택이 “성상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감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가 잠저시에 사패 시노비의 아들이다. 경자(庚子)년 직숙할 때에 이 사내가 들어와 나를 시종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겨우 십여 세였다. 글에 능해 ‘위선최락(爲善最樂)’ 4 글자를 섰다. 그 후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막연하여 알지 못했는데, 들으니 홍봉한의 집에 있다고 하여 불러 본 것이다. 이 사람이 비록 미천하지만 숙직할 때 본 적이 있는 자로 지금 생각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금위영에 교련관이 비어 있으니 이 사람을 차출하는 것이 가한가?”라고 하였다. (구)선복(具善復)이 말하기를 지금 비어 있으므로 하교에 따라서 차출할 수 있습니다. 상이 “오늘 행하라.”라고 말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김광택의 아이 때 이름이 노미였고,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경자년 즉, 1720년에 영조를 시종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이들의 이름을 오래 살라는 뜻으로 천하게 짓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놈 저 놈’ 할 때의 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광택은 당시에 10여 세 였다고 한 점을 볼 때, 1710년 이전에 태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미있는 점은 영조가 김광택이 자신의 사내 종으로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은 천인이 되는 것이 신분제의 기본이었다.영조가 김체건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으로 볼 때, 광택의 어머니가 계집 종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어, 원래는 공노비였다가 숙종 혹은 경종으로부터 연잉군 시절에 영조가 내려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체건이 1710년 이전에 영조(당시 연잉군)의 호위를 담당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영조의 계집 종과의 사이에서 김광택이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택이 관노였음은 '승정원일기' 영조 23년(1747)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조 23년 정월 22일) 이이명(李頤命)이 약원(藥院)에 재직할 때, 김체건의 아들 국표(國標)를 불러 나라를 위하여 ‘위국망신(爲國忘身)’ 4자를 쓰게 하고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 이 (아이)는 관비 소생으로 나(영조)의 사내 종이다. 와서 이 일을 알렸는데, 내가 국표에게 명하여 이이명이 고친 광택으로 그 이름을 삼게 했다.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약원(藥院) 즉, 내의원(內醫院)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 김체건의 아들 국표를 불러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과 함께 광택이 관비 소생으로 영조의 사내 종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래 정식 이름은 국표였는데, 이이명이 개명해주었고, 영조가 이를 허락해 ‘광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김광택은 문장과 서예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라는 뜻의 ‘위선최락(爲善最樂)’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잊는다.’는 의미의 ‘위국망신(爲國忘身)’ 등의 글씨를 영조와 이이명이 쓰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광택의 글쓰기 솜씨는 아버지 김체건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김광택전」을 보면, “(김광택이) 7․8 세에 (아버지) 체건이 하루는 문을 밀고 빈 관사에 가서 붓을 물에 담궈 관청 위의 현판을 베껴 썼다. 대자(大字)를 배운 까닭에 (글씨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 솜씨는 아버지의 영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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