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무예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하는 이유?

  

이정규 사범의 무예 사랑방 - 무카스 연재를 시작하며


이정규 사범

오래전에는 좀 사는 집이라면 사랑방이 있어 그곳에서 주인장은 과객을 맞으며 오가는 이야기들을 듣거나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세상사와 부족한 지식을 채워가기도 했다.

사랑채를 드나드는 과객들 덕분에 모르던 세상을 듣고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공부가 되겠는가? 이런 사랑방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워낙에 시골에 사는 내겐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그립던 차에 무카스에서 작은 사랑방 한 채 내어 준다니 이런 행운은 내게 과분하고 감사한 일이지 않겠는가?

이 사랑방을 통해 나는 나와 같이 무예의 길을 가는 많은 이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인생에 많은 길 중에 무예의 길을 걷는 이들은 모두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이 뜨거운 가슴을 서로에게 열어 줄 수 있는 사랑방이 되길 소망한다.[필자 주]

 무예 사랑방의 첫날


1) 하드웨어뿐인 컴퓨터? 문일지십후(聞一知十後) 용사만배(用事萬倍)

<태권도의 과학>이란 책을 낸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책이련만,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지고 봐 주신 분들께서 정말이지 과분한 격려를 보내 주셨다.

대단한 수준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읽기 쉽게 쓴 덕에 그런가 보다. 제목부터가 딱딱하고 재미없을 책을 끄적거린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책에서 밝히지 못한 사정을 조금 소개하는 것으로 이 사랑방의 첫날을 열어 볼까 한다.

내가 한국에서 태권도를 배울 때 질문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죽도록 차라면 차고 지르라면 질렀다. 무서운 코치님의 지시에 따라가질 못할 때는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엉덩이 찜질을 당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잘 알아들었었다.

그런 내가 미국에 와서 ‘태권도’란 말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어린 수련생들을 모아 놓고 ‘Tae Kwon Do’를 가르쳤다.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 빨리 차! 세게 차!’ 한국물이 푹 들어 있었던 나로서는 이 단순한 지시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들이 안 맞아 봐서 그런가 보다 하고 죽도로 한 대씩 딱! 딱! 하고 패주기도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부모들을 뒤로 한 채. 하지만 워낙에 무식하고 당당했던 나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당시에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으~ 미쳤지! 미국서 이건 심각한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어쩌다가 손이라도 들고 못하겠다고 하면 ‘이런 건방진, 하라면 할 일이지! 말대꾸?’ 눈을 부릅뜨면 슬그머니 손이 내려갔다.

한국에서 고작해야 열 명 남짓의 선수들을 한 명의 코치가 전담해서 가르치던 소수정예 훈련만 받아온 내가 태권도 구경도 못해본 수련생들을 그것도 서로 다른 연령대의 아이들이며 청소년들을 섞어 20-30명씩 한꺼번에 가르치려니 부딪히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어는 짧아 의사소통도 안 되고. 느려터지고 약하고 의지까지 박약해만 보이는 수련생들은 속 터지게 맘에 안 들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각 스포츠의 엘리트 선수들은 소수 정예그룹에 들어가서 한국 이상 박 터지게 훈련한다. 훈련 중에 체력이 달려 토하거나 눈이 뒤집어지고 쓰러지는 것은 다반사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눈 하나 까딱 안 한다. 악을 쓰며 선수들을 구박하는 코치는 때리지만 않을 뿐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도 않는다.

선수들은 이 소수 엘리트 그룹에 속해있다는 자부심과 쫓겨날 때의 불명예를 두려워해 눈물을 머금고 군소리 없이 혹독한 훈련을 다 소화해 낸다. 그런 엘리트들도 아니고 재능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수련생들을 가르치려니 실망스럽기까지 했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울상이 되어있던 한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범님 실망시켜 드리고 싶진 않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 사범님 말씀처럼 세게, 빠르게 찰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진심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막막했다. ‘그야, 뭐....... 새벽에 일어나 계단 뛰기도 열심히 하고, 다리에 자전거 튜브 매고 발차기도 하고.......’ 원리와 방법을 묻는 학생에게 “그냥 다리에 힘줘서 세게 차면 돼.” 그러나 이것은 답이 아니었다.

만약 같은 질문을 수영코치에게 물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어떻게 해야 빨리 헤엄을 칠 수 있을까? “그냥 빨리 팔다리 휘저어 헤엄쳐!” 그러고도 훌륭한 코치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육상 코치라면 어떨까? 어떻게 해야 빨리 달릴 수 있는가? “잔말 말고 죽도록 뛰어, 그럼 빨리 달려!” 이런 코치를 어떻게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수련생들에게 하고 있던 짓이었다.

건강한 신체와 스트레스 해소 정도를 목적으로 수련을 하는 수련생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이 길이 자기의 인생이 된 지도자의 길을 걷는 이라면 아마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예에 있어서만큼은 수련생들에게 있어서 우리 지도자들은 정말 스마트한 컴퓨터 같은 존재들이다. 무엇을 묻던 착착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패하지 않는 천하무적이라 생각한다. 그 만큼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지금껏 우린 컴퓨터의 하드웨어 격인 육체의 단련을 위해선 정말이지 누구 못지않게 심장이 터지도록 열심히 수련했었다. 그런데 정작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격인 무술 전반에 대한 원리와 제반지식은 머리가 터져라 쌓지를 못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소프트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다. 하드웨어에만 힘을 써서는 안 되는 시대이다. 더 성능 좋은 소프트웨어를 속속 갖추어야 한다. 즉, 우리가 수련하는 무예에 대한 해박한 지식, 단순명료하면서도 과학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불가(佛家)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선문답 중 하나가 생각이 난다. 평생 도(道)를 닦으며,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승(禪僧) 하나가 있었다. 정말 목숨보다 간절하게 도를 깨닫고 싶어 경전도 많이 읽고 수행도 식음을 전폐하고 할 정도였지만 답을 찾지를 못했다.

그러던 중 한 고명한 선사(禪師)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천 리가 멀다 않고 한걸음에 달려가 자기가 애타게 찾던 절대적 진리에 대해 물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은 선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려 보였다. 그 순간 질문을 한 선승은 화들짝 놀라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절을 하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물러났다고 한다.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스승의 위치가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의 전문분야인 무예에 있어서는 어떤 질문에도 간단명료하면서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도장 경영방식이나 도장 관리 프로그램에 대해선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지만, 정작 우리가 가르치는 무술에 대한 핵심 소프트웨어 격인 무술 원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선 공부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은 겉만 갖추고 속은 빈 선물상자와 같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아주 오래전 내가 대답 못했던 그 여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태권도의 과학>을 썼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시집가고 없는 여학생이지만 나중에라도 이 책을 보게 되면 “우리 사범님이 당시에는 영어가 짧아 대답을 못한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나와 같이 무예의 길을 걷는 후배들이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격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한 것이기도 하다.

태권도는 과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기술체계를 갖춘 무예이다. 아니 사실 모든 무예들이 그렇다. 인류의 무예는 아주 오래전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연과 이웃 부족들과의 투쟁 속에서 그 기술들을 하나씩 발전시켜갔다. 돌과 몽둥이를 들고 싸웠던 창칼을 들고 싸웠던 인류역사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무예가 존재하지 않았던 부족이나 시대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예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인류의 지혜를 모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의 기법들을 확실한 검증(전투와 투쟁)을 통해 발전시켜 나간 가장 오래된 인류의 행동 양식일 것이다.

이젠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발전시킨 이 인류 문화의 보고(寶庫)인 무예를 모두가 다 아는 과학이라는 안목으로 정리하고 가르칠 줄도 알아야 할 때이다.

<태권도의 과학>에서 밝혔듯이 팔이 긴 고대의 투석기나 21세기 최고의 기술로 만든 저격용 총의 원리는 똑같다. 원리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안다! 이것은 사물의 원리를 간파해 지식을 얻는 방법이고 똑똑한 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교육의 목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일지십후(聞一知十後) 용사만배(用事萬倍)라. 한 가지 무예의 원리를 이해해서 열 가지를 알고 나면 그 사용처는 만 배에 해당한다고!

난 비록 부족하여 한 가지를 얻어듣고 열 가지를 나열한 책을 썼지만, 우리 무예 지도자들은 분명 나보다 지혜로운 이들이다. 그러니 그 사용처가 만 배에 해당 돼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동료 무예 지도자들이 귀한 시간 짬을 내어 내 책을 읽어 준다면 더 없는 과분한 영광이 되겠다. 아울러 미국 시골 사범의 사랑채에 드나드는 여러 무예의 선각자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닦아갈 무예의 미래가 빛을 발하고 더욱 풍성해 질 것이라 믿는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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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우

    저도 오래 무예를 수련해왔지만 문무 겸비할 수 있어야겠다고 새 도전을 받습니다.

    2015-02-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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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태권도인이 문무를 겸비 할 수 있다는 본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 더욱 좋습니다.

    2012-10-1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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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감한 사범들

    책 잘봤어요 . 만나뵙고 깊이 얘기나누고 싶네요. 과학적인 기술체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는데 .... 어쩜담.... 거지같은 태권도 제도가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책에서 쓴데로 접목해서 발차기 주먹지르기 가르칠수 없는 특이한 상황입니다. 이정도로 태권도가 주먹구구로 발전된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정규 사범님같은분이 국기원에서 교본좀 수정바랍니다. "국기원 원로및 관계자들 잘들어... 아하~아하~ 모르면 배워라. 그동안 너희들하고 안논다. 품증따러 애들 안데려 가~~ 애들도 가기싫탄다! ㅋㅋㅋ 용감한 사범들! 예~~~~"

    2012-09-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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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우리 어렸을 때는 진짜 엉덩이 불나도록 많이 맞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억울하다.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고 못하면 무조건 몽둥이를 들었다. 그런데 빳따 맞으면 정신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처럼 한국도 때릴 수가 없으니, 이정규 사범님의 경험이 참 도움이 된다.

    2012-09-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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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맘큼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이 인상깊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12-09-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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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kd_love

    좋은 글이네요!! 무예 사랑방 기대됩니다^^

    2012-09-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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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o999usa

    이정규 사범님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사범님의 태권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태권도 지도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꼭 구입하여 읽어 본 후에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09-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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