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세종대왕과 한글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8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개국하였고, 유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교 이외의 사상은 모두 이단으로 매도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나 유교 이외의 사상을 매도하고 탄압한 것은 유교 성리학자들인 대신(大臣)들이었고, 세종대왕께서는 남 모르게 우리민족 고유의 도(道)를 보호하고 육성하셨다.

나이 5세에 세종대왕께 불려가 시험을 받고 비단까지 하사받은 조선조 신동이자 천재이며 도인이었던 청한자 김시습은 《징심록 추기》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은근히 영해 박씨(寧海朴氏) 집안 문중(門中)을 두루 구제하셨다. 또 박혁거세왕 능묘를 세우고, 종가(宗家)와 차가(次家) 두 집에 명하여 서울 성균관 옆으로 이거하게 하고, 장로(長老)를 편전(便殿)에 입시(入侍)토록 명하여 은고(恩顧)를 심중하게 하셨다. 그리고 차가(次家)의 후예 박창령공(朴昌齡公) 부자(父子)를 불러 등용하였으니, 때에 나는 이웃에 있어 종사(宗嗣)의 가문(家門)에서 수업하였다. 세종대왕께서 박제상공의 후예를 은근히 대우하심은 당연한 바가 있었으며, 하물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澄心錄)》에서 취본하셨음에랴!’

청한자 김시습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에서 취본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징심록(澄心錄)》은 무엇이며, 영해(寧海) 박씨(朴氏) 문중(門中)은 누구인가?

영해(寧海) 박씨(朴氏)는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363~418년)을 시조로 하는 천웅도(天雄道) 전수자 가문이다. 천웅도는 곧 환웅도로서 화랑도의 근원이다.

관설당 박제상은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세손으로서,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 414~?)의 부친(父親)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라 제19대 눌지왕 1년(417년)에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복호공(卜好公)과 미사흔공(未斯欣公)을 구해 내고 죽으니, 이때 아들 백결선생의 나이는 불과 5세였다.

그리하여 훗날 나라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그의 자손들에게 영해(寧海) 땅을 영지로 주었으므로, 관설당 박제상은 영해(寧海) 박씨(朴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취본하셨다는《징심록》은 무엇인가?

《징심록(澄心錄)》은 관설당 박제상이 살아 생전에 지은 선가서(仙家書)이다.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서(秘書)들과 보문전(寶文殿) 태학사(太學士)로 재직할 때 열람한 자료들을 종합하여 저술한 역사 선가서(仙家書)로, 총 3교(敎) 15지(誌)로 구성되어 있다.

상교 - 부도지(符都誌), 음신지(音信誌), 역시지(曆時誌), 천웅지(天雄誌), 성신지(星辰誌) 중교 - 사해지(四海誌), 계불지(禊祓誌), 물명지(物名誌), 가악지(歌樂誌), 의약지(醫藥誌) 하교 - 농상지(農桑誌), 도인지(陶人誌), 나머지 3지는 알 수 없다.

이중 제1지가 오늘날 전해 내려오고 있는 〈부도지(符都誌)〉로서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와 신라 초기 역사를 적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 선가서(仙家書)이다.

〈음신지(音信誌)〉는 소리와 뜻 전달을 의미하는 ‘음신(音信)’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시 한글인 가림토가 실려져 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취본하신 것은 바로 이〈음신지(音信誌)〉로 보여진다.

〈역시지(曆時誌)〉는 역법(曆法)에 관한 책이며,〈천웅지(天雄誌)〉는 천웅도(天雄道, 환웅도, 화랑도의 근원)에 관한 책이며, 우리 민족 고유의 도(道)를 이르는 것이다.

〈성신지(星辰誌)〉는 별자리에 관한 책이며,〈사해지(四海誌)〉는 영토 지리에 관한 책이며,〈계불지(禊祓誌)〉는 제사 의식 행사에 관한 책이며,〈물명지(物名誌)〉는 동·식물 등에 관한 책이며,〈가악지(歌樂誌)〉는 율려에 관한 책이다.

〈의약지(醫藥誌)〉는 의학에 관한 책이며,〈농상지(農桑誌)〉는 농사에 관한 책이며,〈도인지(陶人誌)〉는 도자기 제작에 관한 책이다.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징심록》에서 취본하시며, 영해에 살고 있는 천웅도 전수자 가문의 종가와 차가를 불러 올려 궁궐 가까이 살게 하며, 벼슬을 주고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셨다.

그러나 단종대에 형조판서(박효손, 1428~1495)와 병조판서(박계손, 1419~1485)를 맡아보던 영해 박씨들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모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복계산 금화현(金化縣)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세조가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북 땅으로 더 숨어들어 갔다.

조선왕조와 영해 박씨 가문과의 인연은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 조상들로부터 비롯된다. 태조 이성계가 꿈에 신인(神人)에게서 금척(金尺)을 받고, 측근인 김생을 은밀히 보내 상담한 곳이 바로 천웅도 전수자 가문인 영해박씨 종사(宗嗣)였다.

‘금척(金尺)’은 바로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 왕이 지니고 있던 신물(神物)로서, 연리지가(硏理之家) 영해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보유하고 있던 신기(神器)였다. 그리하여 영해박씨 가문에는 《징심록(澄心錄)》과 함께 《금척지(金尺誌)》가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금척(金尺)’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권(王權)의 상징물로서 바로 국가 통치권을 의미하였다. 원리는 천부경(天符經)의 이치를 본떠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금(金)으로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尺]로 제작한 것은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꿈에 신인(神人)에게서 금척(金尺)을 받은 이성계가 영해 박씨 종사(宗嗣)에게 사람을 보내 자문과 인증을 구한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국가 통치권의 상징인 금척(金尺)을 얻었으니,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하였고 ‘조선(朝鮮)’이라는 새 왕조를 열어 태조가 되었다.

그러나 금척(金尺)의 연원은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까지 다다른다. 단군도 바로 금척의 이치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태조 이성계는 평소에 금척(金尺)에 관한 여러 지식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했던 것도 바로 단군조선의 ‘맥(脈)’을 잇겠다는 소명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늘의 소명을 받아 금척(金尺)을 보유하고 있던 천웅도(환웅도, 화랑도) 전수자 가문인 영해 박씨 집안의 종사(宗嗣)에게는 신라, 고려, 조선의 왕들이 특별한 대접으로써 보호하며 자문을 구하였다.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도산(仙桃山)에 살고 있는 마령간(麻靈干)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으며, 고려의 현종은 거란이 침략했을 때 강감찬 장군을 보내 방책을 물었으며, 조선의 세종대왕도 영해 박씨들을 궁궐 가까이 불러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셨던 것이다.

청한자 김시습은 《징심록 추기》에서 금척(金尺)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모양은 삼태성(三台星)이 늘어선 것 같고, 네 마디로 된 다섯 치 길이(四節而五寸)이며, 머리에는 화주(火珠, 불 구슬)를 물고 있는 모양이다. 원리는 천부경(天符經)의 수리(數理)를 본 떠 만들었다.’ 여기서 천부경(天符經)의 수리(數理)란 천부삼인(天符三印), 즉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수리(數理)로서, 곧 율려(律呂)의 수리(數理)라는 말이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밖에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인 ‘선배’를 칭송하는 노래를 실어 기리도록 하셨다.

무공(武功)뿐 아니 위(爲)하샤 선배를 아르실세 정대지업(鼎待之業)을 셰시니이다.
토적(討賊)이 겨를업샤되 선배를 다사실세 태평지업(太平之業)이 빛나시니이다.
혀근 선배를 보시고 어좌(御座)에 니르시니 경유지심(敬儒之心)이 엇더하시니.
늘근 선배를 보시고 예(禮)로 꾸르시니 석문지대(石文之得)이 엇더하시니.


‘선배’는 이두문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바, ‘선(先)’과 ‘선(仙)’은 ‘선배’의 ‘선’의 음을 취한 것이며 ‘인(人)’은 ‘선배’의 ‘배’의 뜻[義]을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명칭이며,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의(皂帛)를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의(皂帛)로 옷을 지어 입어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칭하였다고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밝히고 있다.

‘선배’들은 전쟁에서 가장 용맹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각종 지위를 골품(骨品)으로 얻어, 미천한 자가 고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미천함과 관계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고로, 인물이 ‘선배’ 중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바로 이 ‘선배’ 들을 칭송하신 것이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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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harami

    조은글 감사 함니다 고대 문자나 현제 한글으 월리는 갇은 이치 이며 음소 문자라 하듯이 뜻인글자와 뜯인소리를 가치 전하는 글과 말이며 즉 말이 글인 이치를 가지고 잇고 이는 현제도 동일 하답니다 그런대 왜 지금 우리가 그 이치를 모르냐 만은 이들이 한글이 엿부터 잇던 글이라 합니다 허나 그 이치를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군요 이 이치는 외국인이 한글을 쓸수 잇는 시간이면 우리는 한글으 이치를 알수 잇담니다 즉 히루도 안돼어서 그 참 이치를 알수 잇다는 것입니다 도대채 어떠한 상상을 하길래 이런말을 하나 궁금 하지 안으신지요 01036849976 밝은 세해 되시길.

    2015-01-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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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ㄱ은 우리나라 역사선가서 부도지와 징심록추기를 읽어보세요..

    2013-02-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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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ㄱ은 좀더 공부하셔 ~ 쯧쯧

    2013-02-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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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을 쓰네요.

    2013-02-2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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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예인

    정말 재미있어요! 과거에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들이 정말 많았군요~ 글을 읽으면서 운치있던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2-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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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연

    좋은 내용-좀 어렵지만^-^-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구정 쇠세요...

    2013-02-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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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것이 아니고, 고대 선가서 징심록에서 취본하신 것이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2013-02-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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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흥미롭네요.^^~

    2013-02-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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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미소

    우리나라 선도의 역사를 알기쉽게 연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시느라고 수 많은 책과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좋을 것 같군요

    2013-02-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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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신선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정말 흥미 진진 합니다.
    차후에 책으로 발간을 권합니다. 이런 자료들을 한번 읽고 말기는 아깝습니다.

    2013-02-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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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의선인

    조선시대 도인들의 ‘ 한판 삶 ’ 이 기대됩니다, 하하

    2013-01-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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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드디어! 조선시대로 넘어갔군요! ^^

    2013-01-2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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