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사랑방] 도복의 기운

  


미국 이정규 사범

군복의 추억

군대에 있을 때였다. 마실 물조차 귀했던 격오지에서 흙과 땀에 범벅이 된 채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부대로 복귀하던 길이었다. 인솔 장교가 20분을 줄 테니 목욕을 하고 나오라며 눈꼽만한 시골 목욕탕 앞에 수송트럭을 세웠다.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후딱 벗고 욕탕에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씻을 때는 좋았는데 막상 옷을 입으려 탈의실로 나오자 뜨끔했다. 발가벗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상사, 소령, 중령 계급장을 붙인 군복들을 집어 입고 있었다. 평범한 시골동네 목욕탕이 아니라 군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이었던 것이다. 다 같이 발가벗고 평등하던 욕탕과는 달리 탈의실에선 옷을 입자마자 차별이 생기고 넘어설 수 없는 계급과 신분의 벽이 생겨났다.

옷이 주는 기운

옷이란 이렇게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 사회적으로 신분과 계급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인류역사에서도 보면 백성들은 무채색으로 간신히 햇볕과 바람을 막아줄 정도의 옷감만을 걸치고 살았고 지배층은 화려한 채색 옷에 소매와 깃을 넓게 만든 옷도 모자라 이중 삼중으로 옷 위에 옷을 겹쳐 입곤 했다. 이렇게 화려한 복색의 사람들 앞에서 백성들은 자연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옷이 주는 기운이다.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레드카펫이 깔린 시상식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의 옷 하나에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고 토픽뉴스가 되기도 한다. 그 중 옷을 잘 입은 사람은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지만 장소와 격에 어울리지 않게 차려 입은 사람은 ‘패션테러리스트’로 지목되어 안티 팬들의 집중포화에 시달린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이들은 옷 하나도 맘대로 선택해 입을 수 없다. 안목 있는 코디네이터의 지시에 따라 상황과 격식에 맞게 선별해 입는다.

잘 갖춰 입은 옷은 입은 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몸 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는 외에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운까지 담겨진다. 그러니 뜻 없이 함부로 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옷이란 자신의 위치에서 할일을 바르게 하도록 기운을 더해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반바지 차림으로 정무를 본다거나 판사가 캠핑복장으로 법정에 선다면 누가 그들의 말을 권위 있게 듣겠는가? 그래서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공인이라면 항상 단정하고 권위 있게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 특히 무(武)를 통해 자신을 닦아가는 이라면 자신의 닦는 무예의 도복을 잘 갖춰 입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유니폼이 주는 기운

한국을 떠난 지 오래돼서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엔 예비군 훈련장 앞을 가보면 군복이 주는 기운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양복을 잘 차려입고 점잖던 사람들도 군복만 입고나면 아무 곳에나 퍼져 앉아 소리를 지르거나 술에 취해 거리를 휘젓고 고성방가와 노상방뇨를 일삼곤 했다. 군복이 주는 편안함과 더불어 통일된 복장 뒤로 한 개체로서의 자신쯤은 쉽게 숨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우리가 입는 옷에는 기운이 실려 있기에 어떤 옷을 어떻게 차려입느냐에 따라 입은 사람의 정신까지 바뀔 수 있다. 그 예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병사들과 독일군 병사들의 군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연합군 병사들은 색깔이며 디자인이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군복을 입은데 비해 독일군들은 일개 사병에 이르기까지 ‘휴고 보스’라는 명품 남성복업체에서 제작한 군복을 지급 받았다. 물론 나치장교들의 군복은 한층 더 화려했다. 말쑥하게 잘 빠진 이 군복들은 진흙탕 싸움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복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우아할 정도였다.

이렇게 비싸고 잘 빠진 복장을 입은 독일병사들은 군복을 통해 특별한 사람으로 정신개조를 당했다. 특별한 복장을 갖춰 입음으로서 독일군에겐 선택된 특별한 군인이란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적군에게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한 상대로서의 인상을 동시에 심어 준 것이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의 진군은 가히 질풍노도와 같았고 수용소에서 그처럼 무자비하게 평민들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도 군인, 경찰을 비롯해서 강한 협동심이 요구되는 조직에서는 멋지고 특별한 유니폼을 착용시켜 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한편 임무와 직책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편하다고 함부로 입어서는 안 될 것이 옷이다. 잘 갖춰 입은 옷은 입은 사람의 품행과 정신마저 개조하는 기운이 담기기 때문이다.

무인의 상징, 도복

뭘 입어도 구색이 맞지 않아 ‘패션테러리스트’로 유명했던 나는 비싼 옷을 입어도 싼 걸로 보이고 제 옷을 입어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별다른 재주를 타고 났다. 그나마 입혀놓았을 때 봐줄만 하고 내 옷 같아 보이는 옷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복이다. 아마도 평생을 입은 탓에 그나마 나의 기운과 가장 잘 어울리고 나라는 사람의 성향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인가 보다.

오래 전에 미국 L.A에 정준 관장님께서 운영하시는 도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영화로도 유명한 필립 리 사범님이 계신 곳이기도 하다. 이 도장에서 특별하게 감명 받은 것은 바로 유단자가 되어야만 입을 수 있는 검정도복이었다. 키 크고 잘 생긴 블랙벨트들이 깃이 빳빳한 검정 도복을 늘씬하게 차려 입고 있었는데 유독 그 도장에서 제일 어른이신 정준 관장님은 겨드랑이가 다 터지고 소매까지 너덜너덜한 희멀건 한 회색도복을 입고 계셨다. 물론 처음엔 새까맣던 검정도복이었지만 오랜 시간 색이 바래 회색이 된 것이었다.

도복재질도 매우 두꺼운 천이었건만 닳고 달아서인지 그 유연한 몸동작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부드럽고 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동작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나오는 그 도복이 너무 탐이 났다. 그 도장에선 색이 허옇게 바랜 도복을 입을수록 고단자이고 넘어 설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이로 취급을 받았다. 낡고 바랜 도복에서 느껴지는 오랜 경륜과 내공은 실로 보는 이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었었다.

나도 그런 도복이 탐나서 두꺼운 재질의 검정도복을 사 입긴 했었는데 풀을 매겨 놓은 듯 얼마나 뻣뻣하던지, 동작을 할 때마다 벽돌을 매어단 듯 부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목과 겨드랑이 그리고 사타구니 피부가 쓸려 입기가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몇 번을 빨아도 바래지 않는 색과의 싸움 끝에 얼마 만에 편한 도복으로 갈아입고 마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도복이 주는 기운

초보 수련생들에게는 아무리 멋진 도복을 입혀 놓아 본들 어딘가 어색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기운과 도복의 기운이 맞지를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땀에 젖어 색이 허옇게 바라고 여기저기 몇 번을 기워낸 듯 허름한 도복을 입은 무인들을 보면 어찌된 일인지 푹 고아낸 곰국처럼 깊은 맛과 품위가 느껴진다. 수없는 땀 흘림 속에서 입은 이의 기운이 세월의 깊이 도복에 배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서영선 관장님은 76세의 연세에도 매일같이 도복을 입고 도장을 나서신다. 아직도 초보자가 블랙벨트가 되기 위해선 50갤론(1갤론:3.78리터)의 땀을 흘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런 분들의 진정어린 수련기풍과 땀에 물든 도복이 다음 세대까지 전해졌음 하는 바람이지만 도복하나로 평생을 버티는 시대가 아니니 꼬질꼬질한 도복을 고집할 것만은 아니다. 오랜 수련의 기풍을 보여 주고 싶다면 세월만큼 낡은 블랙벨트를 매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무인들에게 도복은 정신과 육체를 다잡는 중요한 수련도구이기에 항상 깔끔하고 빈틈없이 입어야 할 것이다. 그간 닦은 진심어린 수련의 결과가 도복을 통해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미국 무술 경기장에 가보면 출전을 기다리며 띠도 매지 않은 도복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거나 도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발차기를 하는 사람들도 본다. 케첩자국 선명한 도복에 핫도그까지 물고 다니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아이들도 있다. 경기에 나서 실력을 보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도복은 정갈한지, 자신이 닦는 무예와 도장이름을 새긴 도복을 입을 준비는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아쉬울 때가 있다.

수련장 외에서의 복장, 평상복의 기운

도복은 수련을 위해 입는 옷이니 수련을 벗어난 시간과 장소에선 정갈하고 단정한 복장으로갈아입을 줄도 알아야 한다. 특히, 지도자라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련생들을 위해서 옷을 갖춰 입을 줄도 알아야 한다. 수련생들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그들이 부끄럽지 않게 반듯한 의복을 갖추어 주는 것도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옷이란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상시 입는 옷에도 그 자체로 만든 사람의 정성의 기운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큰 정성 들이지 않고 대충 만든 싸구려 옷은 입어도 별 품위가 나지 않고 그나마 한 번 빨고 나면 금방 헌 옷처럼 보인다. 이런 옷을 입으면 아무 곳이나 털썩털썩 주저앉게 되고 행동도 단정하질 않게 된다.

반면에 한 뜸 한 뜸 정성을 다해 만든 옷이라면 비쌀 수밖에 없고 그만큼 입었을 때 기운도 좋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옷을 입으면 자연 몸가짐도 조심스러워지고 행동도 품위 있어지니 대하는 사람들마다 공손해지고 조심스러워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비싸다고 다 좋은 옷은 아니다.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자꾸 입어서 나와 기운이 맞을 때 내 옷이 되고 그 값을 하는 법이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옷도 어쩌다가 한 번 입던지, 아니면 그 옷에 맞는 기운을 갖추지 못했다면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런 꼴로 보이게 될 터이니 말이다.

옷의 색깔과 기운의 척도

옷은 현재 나의 기운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내 기운이 자꾸 가라앉고 탁하다면 왠지 모르게 우중충한 색깔의 옷들만 주워 입게 되고 내 기운이 맑고 상승하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밝은 색깔의 옷들을 입고 다니게 될 것이다.

지금 내 기운의 정도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옷장 문을 열어보면 된다. 어떤 색깔의 옷이 더 많은가? 이것이 나의 기운 상태를 말해준다. 옷장이 밝은 색깔의 옷들로 채워질수록 내 생활 속에도 맑은 기운이 돌기 마련이다. 그러니 옷장에 우중충한 색깔의 옷과 때 지난 묶은 기운의 옷들로 가득 차 있다면 대담하게 바꿔볼 필요가 있다.

한참 인기 있고 잘 나가는 연예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밝고 화사한 새 옷들을 입는다. 우중충한 옷, 때가 지난 옷을 입고 다녀서는 맑은 기운을 끌어당길 수가 없다. 즉, 인기를 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일부러라도 맑고 밝은 색상의 옷들을 찾아 입고 헌옷은 정리하여 새 옷으로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예전엔 대부분의 무예들이 흰색이나 검정색 도복들로 일괄된 색깔의 도복만을 고집하곤 했었지만 요즘은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의 도복들이 많이 개발되어있다. 그러니 자신의 개성에 맞게 밝은 색과 산뜻한 스타일의 도복으로 변화를 주어 보는 것도 새로운 기운, 맑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좋은 시도가 될 것 같다.

[글 = 이정규 사범 ㅣ Lee’s 태권도교육센터ㅣmasterjung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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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tf에서 태권도 경기 하는 선수들은 앞으로 아디다스 용품을 입으면 안되다는 규정을 만들거라는 소문을 아디다스쪽에 퍼트리면 아디다스쪽에서 왜 그런 규정을 만드는냐라면서 문의할거 아냐..그러면 그때 태권도에서 이익을 보면서 스폰이나 투자를 안하기때문이라고 하면..아디다스도 바보 아닌이상 먼가 스폰이나 투자를 할거아냐..용품시장이 조단위인데 그 큰 시장을 싹슬이 하면서 스폰을 안하다는게 말이되는건가?

    2015-08-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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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날 이상한데서 스폰서 찾지 말고 태권도 분야에서 이익을 챙기는 회사에게 이익에 얼마를 태권도에 투자 하거나 스폰하게 만들어야 정상아냐...맨날 태권도에 스폰서 잘 안붙는다고 불평하지 말고..아디다스나 태권도 용품에서 이익 보는 회사들에게 말해서 스폰하게 만들어야지..태권도가 한국거라고 삼성이나 부영 한국 기업에게 맨날 희생을 강요하냐..정상적이라며 아디다스도 대도처럼 스폰해야 하는거 아냐..

    2015-08-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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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ㅜㅡ

    도복 하니깐 갑작기 아디다스가 생각나네...개네들은 도대체 세계에 도복 팔아 먹으면서 왜 태권도를 위해 스폰을 하는걸 못봤어..도복뿐만 아니라 용품도 무지하게 많이 팔아 먹는데 왜 스폰을 안하는거야..골때리네 아디다스...먼가 wtf 차원에서 아디다스에게 불만을 말해야 하는거 아냐..먼가 클레임 넣고 약간 불평을 아디다스쪽에 말해서 스폰서 하게 만들어야 하는거 아냐..아디다스는 용품시장에서 이익만 챙기고 희생을 안하네..

    2015-08-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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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혈팬

    사범님 글 잃을 때마다 많은걸 깨 닳습니다. 좋은 글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2015-07-3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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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범

    이번주 유악한, 글 감사합니다. 오늘 내가 입는. 옷이 어떠한가 돌아봅니다.

    2015-07-2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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