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뒷담화]국기원 여자화장실 탄생의 비화

  

여성 태권도 권익 신장의 초석을 마련해 준 ‘태권도계 대모’ 김영숙 사범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된 고대 올림픽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 근대 올림픽 1회 대회인 1896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금녀’의 원칙은 유지됐다. 이후 1900년 런던올림픽에서 테니스와 골프에 여성 참여가 허용되면서 금기가 깨졌지만, 복싱과 야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금녀의 영역이었다. 2000년 시드디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한국의 국기 태권도는 남녀 차별이 없는 종목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성들이 태권도를 수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지금처럼 마음껏 도복을 입고 운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선구자가 있다. 바로 김영숙 사범(62)이다.

12일(현지시간) 미국 샌버나디노에서 만난 김영숙 사범


1960~70년대 국내 태권도계를 풍미했던 김영숙 사범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최초의 여성 태권도 전용 도장 개관’ ‘여성 최초 1급 국제심판’ ‘제1회 국제여자오픈 태권도대회 창설’등은 김영숙 사범이 태권도계에 남긴 흔적들이다. 이는 거친 남정네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설움과을 참아내며 이뤄낸 태권도계의 소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혹자는 소수(여자)였기에 가능했다고들 평가절하 하지만, 그건 김 사범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도복 입은 김 사범은 여자가 아니고 무도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이야 남녀 구분 없이 태권도를 한다지만, 당시 여성들에게 태권도는 ‘금녀의 벽’으로 여겨졌다.

김영숙 사범은 ‘여성 태권도인의 대모’로 불리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의 좌충우돌 스토리 중 조금 정치적이고 무거운 얘기들은 차제에 하기로 하고, 배꼽 잡을 만큼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상당히 서글펐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바로 ‘국기원 여자화장실 탄생의 비화’다. 사건은 1972년 국기원 제7기 태권도지도자 교육이 열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의 필요성을 제기돼 국기원이 설립됐다. 하지만 당시 교육시설은 대여섯 명이 몸을 녹일만한 작은 난로 하나에 100명의 지도자가 의지해야 했을 정도로 열악했다. 문제는 총 100명의 교육생 중에서 김 사범 혼자 여자였다는 것이다. 화장실이라고 해봐야 서서 볼일을 보는 남성전용 화장실이 고작이었다.

“도저히 다른 교육생들이 볼일을 보고 있는 화장실에 들어 갈 수가 없었어요. 정말 그것 만큼은 못하겠더라구요. 3일 동안 화장실도 못갔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는데, 한 여자 분이 국기원 1층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거예요. 아! 화장실이구나, 문 앞에 가보니 정말 화장실이라고 써 있는 거예요. 다급하게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죠. 아니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분들이 앉아 있는 거예요. 방 안에는 김운용 총재, 이종우 관장, 홍종수 관장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김영숙이 이렇게 버릇없는 얘가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세상에 화장실이 아니라 '회장실'이었던 거예요. 정말 울고 싶었죠. 그때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얘기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큰 소리로 말했죠. ‘여자 화장실이 필요합니다 ’라고요”. 김영숙 사범의 작은 에피소드지만 이러한 일들이 모여 오늘날 여성 태권도인들의 권익 신장의 기초가 된 것이다.

1960년, 김영숙 사범은 무덕관(과거 태권도 9개관 중 하나)에서 처음 띠를 동여맸다. 수련 초기부터 김 사범은 남과 겨루는 것을 좋아했다. 도장 내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김 사범은 항상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겨뤄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무덕관’ 만이 대한태권도협회(KTA)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1년에 딱 두 번 뿐인 전국대회에 출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없었다. 끈질기게 무덕관의 원로들을 찾아가 설득하기를 수차례, 결국 KTA로부터의 무덕관 단증을 인정받게 하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이후 다년간 전국대회를 석권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전국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10여 년간의 선수생활이 마무리될 1970년, 김 사범은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 최초의 신화를 써내려간다. 먼저 그해 여름에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여성최초의 태권도장을 개관한 것이다. 지금의 이화여대 태권도부의 모태도 이 시기 김 사범이 학교 측에 수차례 부탁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여성이라고 태권도를 못해? 내가 산 증인인걸? 부딪혀보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막상 개관을 하고보니, 시골 전역에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서울에 온 여성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형편도 좋지 않은 수련생이 대부분이었죠. 수련생은 많지 않았지만 호신술을 배우러 오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죠. 여성이라는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돈이 중요하지 않았죠.”

1979년, 김 사범은 결혼과 동시에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의 활약도 한국 못지 않았다. 2000년 7월 7일에 1회 국제 여자오픈 태권도대회를 개최했는가하면, 2005년에는 제1회 LA시장배 태권도대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미국 초기 밑바닥 끝까지 추락했던 그였지만, 당당히 재기에 성공해 현재 김 사범은 미국에서도 계속 최초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샌버나디노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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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ㅂ되

    지금 국기원화장실 다시 없어 졌는데 ㅋㅋㅋ

    2010-08-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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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져요 사범님

    사범님 진짜 멋있다.

    2009-02-1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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